<영적 교제>/영의 양식

간단 명료한 삼위일체론(옮겨온 글)

소망의 언덕 2006. 10. 23. 11:04

삼위일체 하나님

 

성서에는 없는 개념이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불렀고, 자신을 아들이라고 부르며,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라고 말씀하신다.

또, 아들을 말씀(로고스)라고 부르면서, 천지창조 이전부터 아버지와 하나라고,

창조의 중개자로 제시한다.

 

바오로 사도도 하나님과 어린양(예수)을 구원의 절대자로 제시하며,

예수를 하나님과 동등시하였다.

 

나중에는 성령을 하나님과 동등한 위격으로 보기 시작하였다.

 

이런 신관이 여러 신학자들의 노고에 의해서

정립된 것이 삼위일체 교리이다.

성 아구스티노에 이르러 확립되었다.

물론 이론적으로 이 신론이 완전히 정립되지는 못한다.

항상 의심스러운 부분,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이 남아 있다.

그건 인간의 한계이기에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이렇게 삼위와 일체라는 신학공식을 만들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성경의 말씀을 그 밑바탕으로 하여

정립된 삼위일체론의 핵심은 이렇다:

 

한 분 하나님 안에 아버지, 아들(로고스), 성령이 조화롭게 존재한다고 선포한다.

한 분이라고 말하는 것은 신의 본성을 말하는 것이고,

삼 위라고 말하는 것은 아버지, 아들, 성령이라는 개체를 말하는 것이다.

아버지도 하나님, 아들도 하나님, 성령도 하나님이시지만,

세 하나님이 아니라 한 하나님...

하나라고 할 때 그것을 한 분으로 표시하기 어렵다.

그냥 하나라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개체가 아니라 본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기 시작하면 벌써 졸립기 시작한다.....ㅎㅎ

 

하나님 내부에는 세 위격이 존재하시는데,

아버지를 하나님의 대명사로, 아들과 성령은 그분한테서 파견되는 분이고,

아들은 아버지한테서 낳으시고[탄생], 성령은 아버지한테서 나오신다[발출].

아버지는 기원이 없고,

아들은 아버지한테서 탄생적으로 나오고,

성령은 아버지한테서 아들을 통하여 발출되어 나오신다.

이런 이야기도 하면 할수록 오리무중이다...ㅎㅎ 


하나님이 하나인 이유는 상호내재라는 원리 때문이고,

위격이 셋인 이유는 사랑의 핵폭발 원리 때문이다.

 

상호내재, 즉 서로 긴밀이 침투되어 있어서 삼위는 완전한 일치를 이루고,

사랑의 폭발 때문에 하나의 본성은 구별적 삼위로 확장한다.

그렇지만 소외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내재적으로 존재하시기에 즉시 하나를 이룬다.

 

하나님은 외향적으로  자신을 드러내시기에 창조가 가능하다.

하나님은 만물을 만드시고, 만물을 완성시키신다.

아버지는 창조의 능동인이시고,

아들은 창조의 매개인이시고,

성령은 창조의 완성인이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삼위적 구별: 아버지는 창조하시고, 아들은 구원하시고, 성령은 완성하신다.

내재적 일치: 아버지는 아들과 성령 안에서 창조하시고,

아들은 아버지와 성령 안에서 구원하시고,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 안에서 완성하신다.


보이지 않는 신: 아버지

보이는 신: 아들

동반[연결]하는 신: 성령.


칼 라너: 삼위일체란 하느님의 세 가지 구별 양식이다.

칼 바르트: 삼위일체란 하느님의 세 가지 실존 양식이다.


우리 역사 속에서 인간이 경험하는 하나님은

때로는 아버지 하나님으로,

때로는 아들 하나님으로,

때로는 성령 하나님으로 경험되는 분이시다.

구약시대에는 아버지로,

신약시대에는 아들로,

교회시대에는 성령으로 경험된다.


4. 육화[강생, 성육신]: incarnatio 肉化, 降生, 成肉身

 

천주강생: 하나님이 예수라는 인물로 내려오셨다.

예수는 하나님이시다.

예수는 눈에 보이는 하나님이시다.

그분의 말씀, 행적은 다 절대적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예수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죽여 버렸다.

예수의 고통, 수난, 죽음은 인류를 위한 대리속죄로 이해되었다.


신앙적으로는 예수를 이렇게 고백하고 선포하고 있지만,

오늘날은 역사적으로 예수를 추적한다.

역사적으로는 예수를 그냥 한 인간으로 보려 한다.

예수는 하나님 체험 이후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다가 그만 비명횡사한 인물로 보려 한다.

유대인들은 그를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버릴 수 있었지만, 공개적으로 처형했다. 십자가라는 죄명을 씌어가지고. 일벌백계로 다스린 것이다.

 

그렇지만 예수의 추종자들은 예수부활을 경험한 이래

그분을 하나님으로 선포하게 된다.

이런 배경에는 예수 부활, 예수 발현이라는 특출한 경험이 전제되고 있다.

도대체 예수 부활이 뭐길레 이렇게 사정이 바뀌었을까...?

그래서 예수 부활은 예수 신앙의 핵심이다.

예수 부활은 나중에 살펴 볼 것이다.

 

하여간 예수에 대한 역사적 고찰과

예수에 대한 신앙적 언명은 부드럽게 연결되기가 매우 어렵다.

 

신앙적 언명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할 수 있는 데까지 역사적으로 추적하고

비판적으로 생각할 것인가?

두 가지 축이 팽팽하게 긴장하고 있다.

여기에 적절한 조화가 필요하다.

 

 

*사랑으로님 블로그에서 옮겨왔으며 원글의 '하느님'을 '하나님'으로 고쳐 썼습니다.